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갑종장교 23기)
정전협정 체결이 불과 보름도 남지 않은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금성돌출부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중공군 7월 공세)
당시 6사단은 중부전선 금성지구 좌측을 담당하고 있었고, 19연대 1중대는 금성지구 남쪽 407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야간경계 중이었다. 김종목 소위는 1소대장으로서 중대 우측 최일선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밤 10시, 적군의 폭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종묵 소위는 적군의 집중포화로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도 2개 중대 병력 규모의 중공군을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여
최후 방어사격과 수류탄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수적 우세를 앞세워 아군의 진지 내부까지 침투하였다. 총검으로 백병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김종묵 소위는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고지를 사수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으며, 적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격멸하였다. 전투 후 김종묵 소위는 어깨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후방으로 이송되었지만, 이송 도중 끝내 전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금성전투에서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73년 5월 국립서울현충원 1묘역에 안장되었다. 또한 육군보병학교 동춘관에 흉상을 건립하여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