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군인이 아닌 경찰 신분으로 후방에서 빨치산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권영도(1925∼1952) 경위가 ‘9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고인은 1926년 7월27일, 경남 산청군 금서면 신아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치하인 1941년 금서국민학교(현 금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3월부터 금서면사무소 면서기로 일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 초반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혀 있었던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방어선을 넘어 도망치는 북한군을 뒤쫓아 북진했다.
문제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북으로 도주하는 대신 한국 후방의 깊은 산 등으로 숨어들어가 빨치산을 조직하고 게릴라전에 나섰다는 점이다.
빨치산 대원들이 출몰하는 지역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치안이 불안정하고 주민들의 피해도 극심했다.
빨치산의 대표적 거점이 바로 지리산이다. 이에 산청경찰서는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는 빨치산을 조사·추적하고 토벌하기 위해 경찰 전투부대인 ‘사찰유격대’를 편성했다.
당시 향토방위대원(의용경찰)이던 고인은 유격대 창설에 참여하고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1951년 9월11일 산청경찰서 사찰유격대는 금서면 오봉리에서 매복공격을 실시해 빨치산 2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했다.
11월8일에는 빨치산 약 150명이 한 곳에 집결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빨치산 23명을 사살했다.
이 과정에서 눈부신 공적을 세운 고인은 투철한 국가관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1951년 12월21일 정식 경찰(순경)로 특채됐다. 1952년 7월 고인의 부대는 당시 경남에 남아있던 유일한 빨치산 잔당인 일명 ‘이영희 부대’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인은 곧 대원들을 이끌고 이영희 부대가 숨어있는 곳으로 알려진 산청군 웅석봉 일대로 출동했다.
적의 움직임을 포착한 고인은 대원들 중에서도 용기와 충성심이 남다른 특공대원 5명을 지휘해 선제공격에 나섰다.
이를 시작으로 산청경찰서 본대가 전면적인 토벌 공격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초반부터 전투는 치열했다.
고인과 함께한 특공대원 가운데 3명이 크게 다쳤다. 선제공격 이후 산청경찰서 본대가 합류하며 웅석봉에 숨어있던 빨치산 잔당은 결국 섬멸됐다.
하지만 고인은 전투 도중 적탄에 맞아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정부는 고인에게 경위로의 진급을 추서했다. 고인은 전사 약 3개월 전인 1952년 4월 빨치산 소탕에서 세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유해는 2013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경찰 묘역에 안장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