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수(金海洙)[1924~1950] 경감은 1924년 9월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보통리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초기에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 전투경찰 제8대대 제1중대의 중대장을 맡았다. 강원도 영월군으로 침입한 북한군에 맞서서 영월 화력발전소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영월 녹전전투를 이끌던 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1일, 북한군의 대대적 공세에 강원도 경찰은 대부분 남하하였지만,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윤명운 경무관]는 10만㎾ 규모의 화력발전소가 있는 영월을 사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강원도 비상경비사령부는 전투경찰 제8대대와 홍천경찰서·인제경찰서 병력 100명으로 영월 방어 부대를 편성하고 강원도 경찰학교장 김인호 총경을 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김해수 경감은 전투경찰 제8대대 제1중대의 중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영월 지구에서는 7월 2일부터 수차례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방어 부대의 활약으로 영월 점유에 잠시 성공하였으나, 북한군의 반격으로 영월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어 부대는 영월을 탈환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7월 7일 아침, 영월읍에서 상동 지역으로 철수한 제8대대 제1중대는 사령부의 작전 명령에 따라 중대장 김해수가 이끄는 47명의 결사대로 영월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김해수 경감은 결사대로는 대규모 병력을 갖춘 북한군과 맞서 싸워 승리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전 지역이 화력발전소가 있는 전략적 지역이기에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하여 하는 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7월 8일 14시 무렵, 제8대대 1중대는 영월군 중동면[현 산솔면] 녹전리의 송현고개에 진출하였을 때, 거기에서 선발대로 보이는 북한군과 조우하였다. 이때 김해수가 이끄는 부대는 기선을 제압하고자 선제공격으로 일제사격을 하면서 북한군 일진을 격퇴하고, 계속 추격하여 백병전까지 벌였다. 곧이어 북한군의 후속 부대에게 1중대가 포위된 채 공격을 받았다. 전투를 지휘하던 중대장 김해수 경감은 적의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투가 벌어졌던 강원도 영월군의 녹전리에는 김해수 경감을 비롯한 전투경찰을 기리는 현충시설인 호국경찰 전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해마다 추념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