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항일투쟁에 일생을 헌신하고 순국한 신팔균(申八均) 독립운동가가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신팔균 선생은 1882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삼도수군통제사와 병조판서를 지낸 조부 신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부친 신석희 슬하에서 성장했다. 1902년 육군 참위로 임관한 후 1907년 군대 해산 직후까지 황실의 경호를 맡으며 최후의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했다.
1909년 유명무실해진 군을 등지고 충북 진천으로 낙향한 선생은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에 매진해 보명학교를 여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신민회 청년들이 만든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당)’에도 참여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선생은 만주로 망명, 서간도와 북경에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으며 독립군의 공급처 역할을 했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신팔균 선생의 호는 동천(東天)으로 지청천, 김경천 장군과 함께 남만주 지역에서 ‘삼천(三天)’으로 불렸다. 1920년대 서간도 일대에서는 무장투쟁 조직이 통합돼 ‘대한통의 부’라는 이름하에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한통의부를 서간도 무장투쟁의 선봉으로 키워내려던 선생의 뜻은 1924년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순국함으로써 이뤄지지 않았다. 민족 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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